철학/맑시즘

마르크스K. Marx의 '공산주의'란

namju 2024. 1. 11. 22:16

 전 세계에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바로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현재 공산주의라는 개념은 너무나도 오염되고 신비화되었다. 이는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위로는 북한, 옆으로는 중국 더 멀리는 러시아가 "공산주의"를 국가 운영의 기술로 선택했고, 남과 북이 분리되던 시기 미국과 일본은 동북아시아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남한에 급격한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물결을 불어넣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공산주의는 극심하게 배척되었으며 70년대에는 심지어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으며 그 이후로도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과 그 존재감 때문에 한국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적인 논의와 학문적인 논의는 진전이 없거나 1900년대 말 시점에 정확히 멈춰 있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국가전체주의로 번역하여 구소련에 실적용한 양태를 보였고, 그것이 실패로 판명나자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주류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공산주의는 여전히 그 패배의 업보를 등에 짊어 지고 있다. 허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공산주의'는 너무나도 다른 양태를 띠고 있으며 이번 글에서는 그것의 차이점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개념을 정확히 짚어 보고자 한다.


_공산주의, 시대의 부조리에 대응하는 운동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초기 저작 『공산당 선언』과 『독일 이데올로기』에선 시민사회 속 그것의 부조리와 모순점에 대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운동으로 기술된다. 즉, 초기 청년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는 '반목적주의'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 마르크스는 역사철학의 측면이라기보단 사회철학의 측면으로 번역되었으며 우리는 그 실마리를 '자유인들의 연합체Genossenschaft', 혹은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으로 마주할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산업혁명이 진행되던 당시 헤겔의 노동이 지니는 함의(자연과 인간의 합목적적 물질대사)가 쇠퇴되어 노동은 더이상 그것이 지니는 긍정적 함의를 지닐 수 없다 진단하며 네 가지의 소외론을 『1844 경제학 철학 초고』를 통해 이끌어낸다. 즉, '노동 과정으로부터의 소외'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인간의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가 바로 그것인데, 마르크스는 이러한 소외된 인간성과 유적인 삶의 복권의 맹아를 당시대 사회 내에서 찾아냈던 것이며 이를 바로 '공산주의 운동'이라 불렀다.

『공산당 선언』은 공산당이라는 정당의 강령이 아닌 위에 기술한 바와 같이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는, 즉 당대 사회의 비참한 소외 현상에 대항하는 노동자 계급의 행동 강령을 기술한 저서이며, 여기서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의 관계를 인본주의적으로 탐독하며 이 둘의 상관관계 그리고 소외된 노동의 문제점, 이를 위해 노동자의 의식이 고양되고 도야Bildung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목하며 스스로 자발적인 '계몽'을 요구한다.

 초기 마르크스에게 있어 '공산주의'란 단지 '사회 부조리 대응 운동'에 불과했던 개념으로 정의된다. 이를 현대적 지평과 비교해보자면 수많은 사회운동들이 공산주의 운동이라 칭해질 수 있을 것이다. 2019년 미국에서 벌어진 여성들의 사회적 금욕주의 운동, 'Me Too 운동' 'Stop Asian Hates'라든지 'Black Lives Matter'와도 같은 사회적 정의 실현 운동과 비슷한 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_후기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루이 알튀세르, 사이토 고헤이 등 몇몇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기점으로 그의 방법론이 철학에서 과학으로 전화되었다고 논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오로지 '정치/경제학'적이고 '구조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입장일 뿐 마르크스는 변증법을 토대로 한 철학자로 헤겔과의 인연을 뗄래야 뗄 수 없는 모습을 보이며 초기 마르크스가 논했던 인간성의 복권과 인본주의의 복권은 『자본론』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철학자적인 면모를 보인다는 것이다.

 후기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자본론』 『고타강령비판』 등의 정치경제학적 저서를 통해 '목적주의'로 환원된다. 다시 말해 역사철학이 적용되는 부분으로 흔히들 인지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 5단계론'이 바로 그것이다. 목적주의적 공산주의는 사회 발전 단계의 최종적 형태로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해지고 나면 사회는 자연스럽게 공산주의로 전화할 것임을 그는 천명하며 이러한 전환기의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 논한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인한 독재 시기를 마르크스 자신은 '사회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역사 발전 과정에 따른 목적주의적 공산주의에서 알 수 있듯 공산주의는 '성숙한 자본주의'를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 성숙한 자본주의를 거친 바 없는 북한의 경우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는 확연히 다른 '국가전체주의'라는 것이다. 더욱이 마르크스는 목적론적 공산주의를 외치며 후에는 '국가'와 '종교'또한 폐지되어야 한다고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와 『고타강령비판』에 명시하고 있기에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국가집권적체제'가 아님을 다시 한 번 명확히 알 수 있으며 이는 앞선 라살레, 푸르동과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도 명확히 구별된다.

 예컨대 목적론적 공산주의에서의 법칙은 간단하다. '생산수단의 민주화'가 이뤄져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사회가 도래할거라 역설한다. 이를 더욱 깊이있게 이해하려면 마르크스의 '자연' 개념에 대한 접근이 필요한데, 여기서 자세히 다루진 않겠지만 마르크스가 논한 '생산수단'이란 곧 '자연'과 일치하며 생산수단의 사적소유화를 폐지하자는 것은 그렇기에 '자연과 인류의 화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는 '국가'라는 개념의 폐지를 요청하는데, 이는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을 뜻한다. 쉽게 말해 법과 제도들이 '상부'에서 '하부'로 전이되는 것이 아니라 '하부'에서 '상부'로 올라간다는 것이며 마르크스는 『고타강령비판』을 통해 명확하게 '국가는 우리의 사회적, 문화적 의식 수준에 따라 변화'함을 명시한다. 즉, 우리 스스로가 우리에겐 이러한 국가가 필요하고 저러한 사회가 필요함을 '주체적으로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마르크스는 초기 저작부터 후기 저작까지 줄곧 '노동자 계급의 의식적 실천(노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_자본주의는 역사적 단계라는 사실

 

 마르크스가 지적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자본주의'의 영원성에 대한 개념이다. 사람들은 마치 자본주의가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착각에 빠져 살고 그것을 절실하게 믿고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 속 행해지는 생활양태들이 '정상적'임을 지목한다. 허나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당시 공장법과 노동자들의 환경을 깊이 있게 탐독하고 기술해가며 자본주의 시민사회의 부정태를 목격하고 기술해갔고 더 나아가 '세이' '리카도' '스미스' '밀' 과 같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의 권리와 인간적 생활 양식을 고양시키며 이들에 의해 '부품' '구조' 취급을 받던 노동자들의 모더니즘화(추상적 통계치 속으로 끌어들이는 작업)를 수행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 이전에 경제학자들은 노동자를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며 그저 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해 노동자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금지했다면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철학은 이들의 수준을 인간적 지평으로, 즉 부르주아(경제적 시민 계급)와 동일한 지평으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죽었는가. 미셸 푸코는 그렇게 논한다. 하지만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란 마르크스가 당시대 자신이 그러했던 것 처럼 우리 스스로가 직면하고 있는 우리들의 문제를 진지하게 탐독하고 기술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논했던 '성숙된 자본주의'의 지평에 서 있는 우리는 더 이상 마르크스가 그러했던 것 처럼 공장법을 뚫어지게 바라볼 필요가 없으며 '기계제 대공업'과 '매뉴팩처'의 노동 환경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작업들은 이미 선대에 진행이 되었고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성숙된 자본주의는 각인과 사회 집단에게 엄청난 풍요와 풍족과 쾌락을 선사한다. 하지만 우리들의 의식 수준은 마르크스 당대의 것과 비슷하거나 동일하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자본주의라는 역사절 단계를 벗어나려 하지 않으며 그 안에서 여전히 헤겔적 시민사회를 논하고 있다. 사회가 이데올로기들의 집합체라면 마르크스가 논했던 공산주의 개념의 복권 또한 지양Aufheben을 통해 진지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요소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