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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l, Interrupted(처음 만나는 자유) : 자유의 사용법

namju 2024. 1. 14. 21:03
처음 만나는 자유
18살 난 수잔나 케이슨(위노나 라이더)은 사회와의 괴리를 느끼고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린다. 어느날 두통 때문에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한 그녀는 '자살 미수'로 판정되고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그곳에서 마약과 헤로인 복용으로 끊임없는 방황을 거듭하는 탈출의 귀재 리사(안젤리나 졸리)를 만나고 그밖에 그녀보다 훨씬 심각한 정신상태에 놓인 소녀들을 만난다. 마음 속에 자기만의 비밀을 품고 있으면서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 수잔나와 리사는 차츰차츰 가까워지고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병원을 함께 탈출하기도 하나 다시 돌아온다. 이렇게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로 상처를 어루만져주던 두 사람에게 위기가 찾아오는데, 리사는 우연히 수잔나의 일기 속에 있는 또 다른 비밀을 발견한다. 수잔나가 일기에서 정신병원의 친구들에게 대해 솔직히 느낀 바를 적은 글이 문제되어 수잔나와 친구들은 다투게 되는데...
평점
8.0 (2000.06.24 개봉)
감독
제임스 맨골드
출연
위노나 라이더, 안젤리나 졸리, 클리어 듀발, 브리트니 머피, 자레드 레토, 제프리 탬버,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우피 골드버그, 안젤라 베티스, 질리안 아메난테, 드루시 맥다니엘, 알리슨 클레어, 크리스티나 마이어스, 조애너 컨스, 브루스 알트만, 트래비스 파인, 엘리자베스 모스, 미샤 콜린스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 위노나 라이더Winona Ryder, 브리트니 머피Brittany Murphy 등의 여성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이는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는 작가 수잔나 케이슨Susanna Kaysen의 동명 소설 ‘Girl Interupted'를 영화한것이다. 모두 다른 이유와 다른 병명으로 정신병동에 입원한 소녀들의 일상과 ‘정성화’의 과정, 그리고 그 속에서의 충동적 향유.
영화 제목에 관해서는 개인적으로 가장 잘 번역된 제목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영화 전체를 걸쳐 두 가지의 자유에 대해 보여준다. 하나는 추상적 자유인 ‘freedom', 두번째로는 구체적 자유인 'liberty'. ‘자유’에 대해 충분한 사유가 필요한 사람이라거나 정확한 관념이 확립되지 않은 사람들은 이 영화 속에서 그 누구보다 더 잘 잠식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우린 자유롭길 바라고 행복해지길 바란다. 그것도 너무나도 막연히, 실체도 없는 불투명한 추상성인 ‘자유’를 망망대해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유토피아utopia(없는u + 장소topia)를 꿈꾼다. 우리는 디스토피아dystopia(불완전한dys + 장소topia) 또한 상상하며 온갖 아토피아atopia(형용할 수 없는 초월적인 어떤 것)를 사색할 수 있다. 우리의 두 발은 여전히 이 사회, 권력이 가해지고 배제가 이뤄지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다른hetero + 장소topia)에 있지만 말이다.


_정신병원이라는 헤테로토피아

‘헤테로토피아’란 무엇인가, 미셸 푸코M. Foucault는 ‘헤테로토피아’에 대해 이렇게 논한다: “아마도 모든 문화와 문명에는 사회 제도 그 자체 안에 디자인되어 있는, 현실적인 장소, 실질적인 장소이면서 일종의 반反배치이자 실제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인 장소들이 있다. 그 안에서 실제 배치들, 우리 문화 내부에 있는 온갖 다른 실제 배치들은 재현되는 동시에 이의제기당하고 또 전도된다. 그것은 실제로 위치를 한정할 수 있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들이다. 이 장소는 그것이 말하고 또 반영하는 온갖 배치들과는 절대적으로 다르기에, 나는 그것을 유토피아에 맞서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르고자 한다.” 다시 말해 제도적인 정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배제된 현실 속 공간이라는 뜻이다.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는 '정신병동'이라는 독특한 장소에서 '자유'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논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할 것은 '정신병원'이라는 광인(이 글에서 광인은 정신질환자와 동어이다.)들의 집합소이다.  
정신병원은 하나의 장소이다. 그것은 단지 지구 상 존재하는 장소 중 하나가 아니라 '권력이 가해져 배제와 소외가 이뤄진 흔적'이 남아있는 '헤테로토피아'이다. 그곳은 철저하게 광인들을 사회(안)에서 고립시키고 소외시키고 배제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이며, 그것은 인류사를 통해 점점 사회의 내재적 외부로 밀려나게된다.-정신병동은 사회 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회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병동, 알코올중독병원, 장례식장, 공동묘지 등은 인류사 전체를 걸쳐 점점 사회의 중심부에서 밀려났고 사회의 중심부를 지탱해주는 내재적 외부 역할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도심에 위치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관계를 형성하던 것들이 점점 도시 외곽으로 밀려났다는 소리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광인들은 사람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취급을 받는다.
그들은 간혹보다 조금 더 많이 인류 문학사나 예술사에서 '광인의 통념'으로 설명되는 일화로 등장한다. 가령, 주인공이 지혜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소문이 자자한 광인이나 마녀를 찾아간다거나, 비극이나 희극의 절정에 있어 광인의 예언이나 조언이 극에 반전을 가져오는 경우는 어떠한가.-‘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대표적이지 않을까 싶다.- 심지어 라캉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렇게 '히스테리'를 지닌 이들을 '진실을 보는 자들'이라 바라보기까지 한다. 그들은 사회의 제도와 법과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에 복종하지도 않고 복종할 의지도 없기에 가장 날것의 현실을 보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들은 당연 자유롭다. 광인이기에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지녔으며 그 누구도 광인에게 시비를 걸진 않는다. 하지만 광인들이 내재적 외부에 자리잡게 된 것은 12세기 유럽의 마녀사냥 이후이다. 기독교는 온갖 말도 안되는 핑계거리로 고양이와 남녀노소 불문 '마녀'라고 불리는 자들을 잡아들여 대량 학살을 범하며 '정상성'의 범주를 지키기 위해 '오염'을 씻어냈다. 마녀들은 자취를 감추고 도시 밖이나 외부로 나갔으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집시가 되기도 했다.
정상성에 대한 정화 방법론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산채로 묶어 불에 태우고, 정신질환자라는 이유로 펄펄 끓는 쇳물을 뇌에 붓는가 하면 얼굴의 일부를 도려내고 쇠꼬챙이로 신체를 쑤셔대기까지, '이성'과 '정상'의 이름으로 '비정상'과 '광기'에 대한 제노사이드는 지속되었고, 시대가 바뀌며 푸코의『광기의 역사』에서 언급하듯 '광인들의 배'에 광인들을 싣고 망망대해를 보내는가 하면, 유럽에 나병 전염성이 완화되자 더 이상 쓸모없게된 나병 환자 수용소를 개조하여 그곳에 광인들을 욱여넣고 통제하는 식으로 광인들에 대한 통제는 발전했고 정신병원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정신병원은 철저히 ‘권력’이 가해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헤테로토피아의 산물이다. 가령 그것은 ‘정상’과 ‘이성’의 범주 전체를 떠받들며 고정시킨다. 박물관이 ‘현재성’과 ‘일반’의 범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과거’와 ‘역사’의 헤테로토피아 이듯이 말이다.
권력이 광인들을 배제시킨 방식은 끔찍하다. 그것은 인간성을 표지로 인도적인 치료와 돌봄의 형태로 정신병원이 “발전” 했다 지목하지만 그 표지를 넘겨 내피를 들여다본다면 여전히 정신병원은 ‘님비NIMBY'현상의 대표 주자 중 하나로 자리한 채 (공간성 뿐 아니라 사회성 또한) 점점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으며, 그로 인한 분리의 확고한 이원화가 이뤄졌다. 광인들은 더 이상 도시 내에서 광인이라는 이유로 자유롭지 않다. 광인들은 이제 그들이 도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유롭고, 정신병원이란 자유의 담지자가 존재하기에 자유롭다. 그리고 이 자유는 철저하게 소외와 배제를 일컫는다. 그들은 이제 버려졌기에 자유롭다.


_자유와 자유

이렇듯 정신병원이라는 헤테로토피아를 고려한다면 영화 속엔 정확히 두 가지의 자유(freedom과 liberty)가 등장하며 대립하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또한 각각 이 두 자유를 대변하는 캐릭터가 극명히 등장하기에 그것을 포착하기란 쉽다.
추상적 자유, 흔히 freedom이라 번역되는 이 자유는 대게 사람들이 ‘자유’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이다: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억압 기제가 없는’ ‘내 바람이 정확히 실현되는’ 등이 그러하다. 이 자유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경향을 배제한다. 다시 말해, 순수히 자연적이고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욕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따라야 하는 자유의 관념은 이런 추상적 자유라기 보단 ‘구체적 자유’라 불리는 liberty에 가깝고, 당연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다수의 자유는 바로 이 자유다. 구체적 자유는 추상적 자유와는 달리 사회성과 역사성을 고려한다. 예컨대,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기에 대한민국 노동법에 따라 노동하며, 기본적으로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한국어를 사용하며, 한국의 관례적 가족 의례를 따르기도 한다. 쉽게 말해 이는 사회적 관계망 속에 형성된 자유이자 제도와 법적으로 보장받는 자유이다.
영화 속에서 안젤리나 졸리가 연기한 리사는 명확히도 추상적 자유를 대변하고 위노나 라이더가 연기한 수잔나는 반대로 구체적 자유를 대변한다. 이 공식은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바이다. 허나 영화는 추상적 자유를 진정한 '자유'라 표현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착각하고 있을 '자유'의 사용법은 영화 후반부 수잔나와 리사의 대치 장면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주체임을 수세기동안 사회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논해왔다. 탈현대에 와서까지도 인간에게 주어진 선험적 사회성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 더 나아가 인류학자 김현경은 자신의 저서 『사람, 장소, 환대』에서 '인간'과 '사람'의 정의를 분계하며 자연상태에서 살아가는 객체를 '인간'으로, 사회적 성원권을 얻어 살아가는 사회적 객체를 '사람'이라 정의한다. 이러한 이론을 토대로 한다면 영화 속 리사가 대변한 '추상적 자유'는 철저히 외면받는, 다시 말해, 인간의 것도 아니고 사람의 것도 아닌 그저 어떠한 '사회 구조물의 것'이다.
인간은 어떠한 형태(비록 그것이 소외와 배제이지만)로 '자유'를 누린다.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원시부족적 삶을 바라본다면 이는 분명하다. 그들은 문명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 집단과는 달리 독단적 생활양식을 채택하며 살아가고, 사람들 또한 그들의 생활범위를 침해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들의 공생엔 어느정도 '의식적이고 암묵적인 계약'이 채결되어있다. 그들은 사회에서 완전히 벗어나있기 때문에 사람은 아니지만 독자적인 집단을 형성하며 스스로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해준다.
허나 영화 속 헤테로토피아인 '정신병원'을 존재의 담지자로 하는 정신병자들은 상황이 다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사회 안'에 속해 있지만 이들은 '히키코모리'들 처럼 사회적 성원권을 보장받진 못한다.-이 둘 사이를 분계하는 것의 논점은 사회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성원권이다.  우리 사회는 아무리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들이라도 그들의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해준다. 단순한 사회성의 부족은 그저 정신질환이나 광기와는 다르다.- 정신질환자들은 정신병동에서 스스로 독자적인 생활 양식을 영위하지도 못한다. 그들은 통제되고 억압되는 '사회 전체를 지탱하는 구조물'에 불과하다. 즉, '정상'의 담지자, '정상'을 가능하게 하는 '비정상'의 집단으로 전락한다.
사회가 광인들을 대하는 방식은 스스로의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존립을 가능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앞선 기술에서 처럼 프랑스 고고학자(스스로는 철학자라 불리길 거부한다) 푸코에 의해 이미 이론적으로 증명된 된 바이다. 그렇기에 광인들이 외치는 자신의 자유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임'이 아닌 '구조적이고 수동적임'에 의해서이다. 그들은 자신의 자유를 쟁취하고 행하지 못하며 그들에게 자유는 그저 '정신병' 혹은 '정신병원'이라는 특수한 사회적 장치로 인해 그들에게 물건처럼 주어진다. 어쩌면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는, 정신병동에서 퇴원하자마자 그것의 담지자였던 정신병동으로 다시 반납되어야 한다. 수잔나는 그렇게 진정한 자유와 '처음' 조우한다. 나 자신을 주체로, 능동적으로 행할 수 있음을 근거로 한 진정한 '사람으로서의 자유'와의 불안하지만 달콤한 첫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