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점
- 7.4 (2005.02.03 개봉)
- 감독
- 마이크 니콜스
- 출연
- 나탈리 포트만, 주드 로, 줄리아 로버츠, 클라이브 오웬, 닉 홉스, 콜린 스틴톤, 마이클 헐리, 재클린 티파니 브라운, 피터 르닉, 던컨 레이드
제도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낭만성은 그 대가를 치룬다. 한때 프로이센에 ‘신비주의적 변증법’이 유행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프로이센의 사회 문화적 양태 때문이었을까, 독일 낭만주의는 가장 환하게 꽃피웠다.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도 가장 사랑하는 연인이자 내 인생을 함께할 파트너.’ 낭만주의의 거장 슐레겔은 『루친데』를 통해 누구나 다 원하는 가장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사랑태를 꺼내보이며 큰 파장을 불러왔다.
낭만것은 낭만적으로 끝난다. 그것이 낭만주의의 법칙이다.
_사랑에의 탐독
사랑의 맹아는 우연성과 구체성에 입각한다. 다시 말해 사랑은 우연적인 요소로 시작된다는 것이다. 허나 그 우연성에 족쇄를 걸어두는 것이 있으니 바로 결혼을 통한 가정과 가족의 형성이다. 이 족쇄는 우연성을 영원성(죽음 이전의 시간을 총괄한다)에 포섭시키며 우연성과 구체성을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제도에 편입시킨다. 이것이 바로 당시 낭만주의에 거세게 반하며 헤겔이 논했던 사랑이다. 사랑은 한 사람을 파멸로 이끌어가고 더 나아가 사회 제도에 균열을 가할 수 있기에 이것이 온 사방을 들쑤시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묶어놔야 한다. 제도로 편입되지 못한 사랑은 그 대가를 치루며 언제나 비극으로 끝난다. 그렇기에 모든 우연성과 낭만성은 언제나 자신들을 품을 제도와 습속을 탐닉한다.
두 번째로 사랑은 감정이 아닌 의식이다. 사랑이 감정이라면 쌍방향의 욕망과 충동이 충족됨과 동시에 해체되어야 마땅하다. 감정은 욕구에 기반한다. 그러니까 감정을 잠재우거나 지연시키기 위해선 그 욕구를 무화시키면 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배고플 때 이를 잠재우기 위해 눈앞의 음식을 먹어치워 무화시키고, 슬플 때 이를 잠재우기 위해 슬픔의 동인을 찾아 무화시키려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욕구에 기반한 감정이라면 “나 너 사랑해” “나도 그래” 와 같은 단편적인 대화와 한 두 번의 격렬한 섹스가 동반되면 그 욕구는 해소되기에 더 이상 상대를 사랑할 이유가 사라진다.
하지만 사랑은 대상을 무화시키거나 욕구를 무화시켜 전유하더라도 잔류한다. 자신의 연인이 아무리 밉고 싫어도 여전히 그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은 사랑이 감정이 아닌 의식을 담지하고 피어난다는 증거이며, 밉고 싫은 동시에 좋고 사랑한다는 이 감정적 양가성 그 자체가 사랑이 의식임을 보증한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경제에 기반 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나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 가장 극적으로 재현된다. 물론 사랑의 이러한 양태가 자본주의라는 특정 시대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고대에는 기본적으로 ‘가정’ ‘가족’이라 불리는 가장 보편적 사랑의 양태가 오이코스oikos, 즉 ‘가정경제’의 근저에 놓여있었으며 이로부터 중세의 중매결혼, 계약결혼 등의 일례를 정초한다. 이는 동양도 그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허나 기술의 집약적 발달로 디지털 매개 사회가 도래하며 대부분의 인간성과 습속들이 디지털이나 AI 플랫폼에 묶인 양태를 낳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위피’ ‘틴더’ 와 같은 인스턴트 교류 플랫폼은 ‘우정’과 ‘사랑’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요소들을 수치화시키며 인간 신체로부터 명확히 분리시킨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장 기본적이게 연애 상대와 결혼 상대를 볼 때 그 사람의 ‘경제적 환경’ ‘사회적 환경’을 너무나도 고려하지 않나.
_영화 속 재현된 사랑의 세 가지 근저
앞서 기술했듯 사랑의 근저엔 세 가지가 있다. 다시 정리하자면 첫 번째는 '제도적', 두 번째는 '의식적', 마지막 세 번째로는 '경제적'이다. 이 세가지의 층위는 모두 다르기에 무엇이 맞고 틀린지의 관점이 아닌 다양한 사랑의 양태를 탐독하는 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영화는 이 세 가지의 양태를 모두 서술해가기에 혼잡스럽고 복잡스러운 사랑의 모습을 직설적으로 표현해낸다. 허나 이 모든 양태들 가운데 잔잔히 연명하는 것은 바로 안나와 래리의 '제도가 보장해 준 사랑' 즉 '제도적 사랑'의 모습이다.
주인공 네 사람은 모두 '제도적 사랑'으로부터 시작한다. 댄과 앨리스는 이성애적 연인 관계로 시작하며 안나는 별거중인 남편이 존재한다. 래리는 안나와의 짧은 결혼생활로부터의 이혼으로 시작한다. 이렇게 제도로부터 탈락한 혹은 제도적 사랑으로 나아가는 4명 개인의 사랑은 우연적이고 낭만적으로 시작하는 것이 바로 아이러니이며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영화 속 이러한 사실을 '낯선이stranger'로 표현하는데 이는 사랑이 '낭만적 이러니'로부터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정상적 사랑'은 '낭만성'과 '제도성'의 돌고 도는 윤회 관계라는 것을 또한 적나라하게 표상한다. 댄과 앨리스는 런던 거리에서 만난다. 그 중에 댄과 안나는 사진촬영 중에 우연적으로 사랑에 빠지고 래리는 경제적 관계에 기반하여 안나와 낭만적 인연을 이어간다. 역설적이게도 댄 또한 안나와 낭만적 이러니를 이어가는 복잡한 관계를 보여준다.
사랑의 '의식적 근저' 또한 잘 표상되어있다. 안나와 댄은 서로 각기 다른 사람과 연인 관계에 놓여있음에도 그들의 의식이 언제나 서로를 향하고, 앨리스를 향한 댄의 사랑, 댄을 향한 앨리스의 사랑 또한 의식적 사랑에 기반한다. (안나를 몰래 만나고 있음에도 여전히 앨리스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는 것, 혹은 언제나 일방적 희생을 자처하는 댄을 향한 앨리스의 사랑) 더욱이 래리 또한 출장을 가서 만난 매춘부와의 만남에 죄책감을 느끼고 안나에게 실토하는데 이는 의식의 반향 속에 사랑하는 대상이 자리하고 있기에 감정적 호소와 함께 표현되는 양태이다.
마지막으로 경제적 사랑. 이는 '래리'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재현되는데, 육체적 욕구인 섹스의 수단으로 사용한 '온라인 채팅'을 기반한 플랫폼, 그리고 후반부에 앨리스의 신체(정신+육체)를 돈으로 사려고 한 래리의 모습으로 파악된다.
_더 가까이, 더 멀리
closer: 더 가까이, 혹은 끝맺음. 이는 마치 사랑의 법칙과도 같다. 가장 가까운 만큼 가장 멀어질 수 있는 관계, 혹은 영화에서 표상하듯이 솔직하면 솔직할수록 끝을 향해 달려가는 관계. 인물들이 '낯선이'에게 접근한 동인은 바로 너무 가까운 관계가 선사하는 익숙함, 다시 말해 연인 사이에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은 감성과 낭만의 상실 때문이다. 사실 이는 생물학적으로 너무나도 정당한 동물의 본성으로 그것을 인간 이성으로 억누르려 할 때, 다시 말해 '결혼'이나 '사회 관습(애인 등)'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해 족쇄를 채우는 사회적 본성과 대립각을 이룬다.
사회는 이성이 통치하는 영역, 자연은 욕망이 통치하는 영역으로 거칠게 이분화 하여 바라보았을 때 '한 남성과 한 여성'이 만나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영원히 유지한다는 것은 자연적 욕망을 너무나도 억누르는 양태이고 이것이 히스테리적으로 발생했을 때 우리는 '낯선이'들에게 끌리게 된다. 애인이 있더라도 매력적인 '낯선이'에게 자신의 시선을 두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여기서 사랑의 시작은 동물적 본성에서 시작한다. 허나 사랑의 과정과 끝은 인간적 본성으로 진행되고 끝난다. 'stranger'는 동물적 욕구에, 'closer'는 인간적 욕구에 부합하다는 것인데, 역설적인것은 상대의 인간성을 보려하면 보려 할 수록 동물적 이성으로 퇴화한다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 '솔직함'을 공격적이게 경계하고 민감하게 바라본 이들, 특히나 래리와 댄의 모습에서 그러한 양태들이 표상되는데, 결국 솔직함에 대한 이들의 '접근closer'은 지속적으로 타자 속 '낯섬stranger'을 바라보게 한다. 발화되는 것과 발화되지 않는 것 사이에, 현실태로 발화되는 것만이 사랑에의 노력이라 바라보았지만 발화되지 않음 또한 사랑에의 노력의 한 형태임을 극에 서 있는 앨리스와 안나를 통해 바라볼 수 있다.
이는 누가 맞는가 누가 틀린가 하는 시비판별의 문제가 아닌 뭐가 좋고 무엇이 또한 좋은가 혹은 뭐가 나쁘고 무엇이 또한 나쁜지를 바라보는 사랑의 윤리학적 지평이다. 앨리스는 '일방적이고 희생적인 사랑' 혹은 이를 다시 비유해보자면 '순수한 아이같은 사랑'을 행하고, 래리는 너무나도 '경제적인 사랑' 즉 사랑의 효율성을 중시한다. 댄은 낭만주의의 극에 위치하는 사람으로 '솔직함'을 통한 사디스트를 자처한다. 다시 말해 헌신적으로 의지하는 사랑의 관계 속 주인의 위치를 점하고 싶어하고 자신은 노예에 대해 모든 것을 알 권리를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안나는 댄과는 반대로 마조히스트적인 모습을 내비친다. 래리와의 섹스에서, 혹은 래리와의 감성적 관계에서 폭력의 대상자로 스스로를 전락시키고 그것이 그녀의 'closer'이지만 댄의 낭만적 따스함에서 'stranger'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영화는 이 네 명의 사랑관 중 누구의 사랑관이 저급하고 누구의 사랑관이 성숙한지를 겨루지 않는다. 그저 '설레는 첫 시작(sweet begining)'인 '낯섬'에 대한 갈망, 그리고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랑관을 지닌 네 명의 개인이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랑을 선택했을 때 사랑의 비극을 기술한다. 여기서 이 비극의 책임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그저 '사랑'이라는 가장 거대하고 추상적인 관념의 잘못으로 나는 지목한다.
_다시 낯선이의 시선 속으로
추잡하게 얽힌 사랑의 관계망 속에서의 승자는 누구일까. 보편적으로 보자면 래리와 안나의 사랑일 것이다. 그들은 사랑의 고난을 겪고 다시 재회하여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낭만-제도-낭만-제도'의 굴레 마지막에 둘의 사랑이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포섭되며 안정적인 양태를 표상한다. 허나 래리 옆에 누워 잠을 청하는 안나의 두 눈에는 공허함이 드리운다. 래리와 자신에게 있어 '낯섬'을 수없이 마주한 그녀는 래리와의 관계 혹은 자신과 자신의 관계가 예전과는 같이 않음을 깨닫고 그녀의 두 동공은 제도의 안정성 속에 여전히 낭만의 결여로 연명할것이다.
댄은 앨리스가 갔던 공원에서 '앨리스 아이리스'라는 여성의 묘석을 발견한다. 거기엔 '앨리스 아이리스, 불 속에서 3명의 아일를 구하고 생을 마감하다.'라 적힌 문구를 발견하는데, 이는 앨리스가 댄에게 있어 그와의 관계 속에서 영원히 '낯선이'로 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앨리스의 본명은 제인으로 댄과의 관계 속에서는 결코 자신의 본명을 언급한적이 없다. 제인은 댄과의 관계에서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도록 낯선이로 남으며 그에게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아이같은 사랑을 퍼부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인은 자신의 고향인 미국으로 귀국하고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운free' 자신을 만끽한다. 사랑에의 탈락은 다시 그녀의 주체성을 확립시켰으며 낯선이의 시선 속으로 회귀한다.
그렇다면 복잡하고 심오한 사랑의 관계 속 '나'라는 자아의 주체성을 지키고 그로부터 자유를 전유한 사람은 바로 래리와 제인으로 남을 것이다. 사랑은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는 하나의 계몽의 변증법이며 제도적으로 보장받지 못한 사랑은 언제나 그 대가를 치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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